떠남의 목적이 아름다운 풍경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봄은 추위에 눌렸던 미각의 살아나는 계절, 난분분 떨어지는 꽃잎과 함께 맛이 길 위에 펼쳐진다. 봄은 주꾸미가 제철이다. 알을 품고 있는 달보드레한 주꾸미의 맛은 삶의 충전이다.
봄의 온기를 따라 서해로 길을 잡는다. 남도지역에서 주꾸미는 전북 부안의 것을 최고로 친다. 해변을 따라 부안을 한바퀴 돌면 주꾸미의 모든 것을 만날 수 있다. 격포항에는 주꾸미 좌판이 펼쳐져 맛을 찾아 떠밀려온 사람들을 맞는다. 모항은 주꾸미잡이 배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물때에 따라 바다로 나선 배들이 알 품은 주꾸미를 잡아 올린다. 일주도로를 따라 조금 더 차를 몰아가면 곰소항이 나온다. 항구 가득한 젓갈 냄새 사이로 주꾸미가 익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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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꾸미 뿐만 아니라 여러 해산물이 가득하다. |
못났어도 맛은 `천하일미’
주꾸미는 그 생김이 볼품 없다. 같은 문어과 중에서도 가장 천대받았다. 문어(文魚)는 이름 앞에 `글(文)’을 붙였다. 선비들은 문어를 물고기 중 최고로 쳤다. 문어의 품성이 선비의 그것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문어는 바다 속 가장 낮은 곳에 몸을 낮추어 산다. 겸양의 미덕을 아는 물고기인 셈이다. 팔이 여덟인 문어과 형제 중 낙지는 힘이 좋다. 기력 잃고 3일을 앓아 누운 소에게 낙지 한 마리를 먹이면 벌떡 일어선다 하지 않던가.
주꾸미는 못 났어도 맛은 천하일미다. 문어의 쫄깃쫄깃 씹히는 맛과 낙지의 부드러운 감칠맛을 모두 가지고 있다. 특히 3∼4월 산란기의 주꾸미는 살이 통통하고, 먹통에 밥알 같은 알을 한 가득 품고 있다. 영양 면에서도 뒤지지 않는다. 칼로리는 낮으면서 필수 아미노산이 풍부해 빈혈에 좋고 콜레스테롤도 낮춰주는 효과가 있다.
격포항에 발을 내려놓자마자 눈을 잡아끄는 곳이 있다. 항구 바로 앞에 좌판을 편 수협 어판장이다. 부안에서 거래되는 주꾸미의 절반은 그곳에서 팔려나간다.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신선함이 수협 어판장의 무기다. 힘센 주꾸미가 `다라이’를 넘나든다. 항으로 주꾸미 배가 들어오면 곧바로 수협 어판장 상인들에게 넘겨지고, 판매가 이루어진다.
4월 어판장 풍경은 왁자하다. 관광버스를 타고 몰려든 외지인들이 여러 가게를 기웃거린다. 곧바로 흥정이 이루어지고 상인은 재빠른 칼질로 주꾸미를 손질해 내놓는다. 바다에서 방금 건져 올려 초장 찍어 곧바로 회로 먹어도 뒤탈이 없다. 자연산 광어나 숭어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한다. 회를 떠서 인근 식당으로 가면 서해바다가 입 속으로 건너온다.
격포항 근처에는 주꾸미 음식점들이 몰려있다. 회나 샤브샤브, 철판볶음, 전골 등 식성에 따라 골라 먹을 수 있다. 봄내음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달래간장으로 비벼먹는 주꾸미 영양돌솥밥도 인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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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보다 아름다운 책 수만 권이 겹으로 쌓여있는 채석강. |
소라껍데기는 주꾸미 집?
모항은 변산의 비경을 품은 곳이다. 그곳은 한때 칠산바다에 떠있는 배들이 풍랑을 만나면 집결하는 거대 항구였다. 그러나 조기떼가 사라지면서 북적이던 배들이 모두 떠났다. 변산이 국립공원으로 묶이면서 모항은 전혀 다른 세상으로 변모했다. 변산의 해안을 잇는 일주도로가 생겼고, 아름다운 풍경들이 길 위에 누웠다.
모항의 포구에서는 주꾸미잡이 배들이 뜬다. 포구 위에는 소라껍데기를 매단 줄들이 가득 놓여 있다. 그것이 주꾸미를 잡는 도구다. 소라껍데기를 줄줄이 매달아 바다 밑으로 내려보낸다. 주꾸미는 집을 만들 요량으로 제 발로 소라껍데기 안으로 들어간다. 한 번 들어가면 주꾸미의 생은 그것으로 끝이다.
“요놈들이 영리함서 또 미련해. 소라껍데기 안으로 들어가면 주꾸미가 입구를 갯뻘 흙으로 막아부러. 다른 어류들이 못 들어오게 하기 위한 것인디, 입구를 닫아 부렀응께 한 번 들어가면 도망을 못 가.” 모항 주민 박선기(59) 씨의 말이다.
주꾸미의 독특한 습성 때문에 주꾸미잡이도 한결 쉬워진다. 밧줄을 끌어올릴 때 소라껍데기 입구만 확인하면 된다. 흙으로 봉해져 있다면 그 안에 주꾸미가 있을 확률 100%다. 주꾸미는 초승달이나 보름달 뜰 때 잘 잡힌다. 썰물과 밀물의 차가 가장 클 때 먹이를 구하기 위해 연안으로 기어 나오는 습성 탓이다.
변산 해안 일주도로의 끝은 곰소항이다. 곰소는 일년 내내 젓갈시장이 열리는 곳이다. 곰소는 염전과 젓갈이 유명하다. 큰 강물이 유입되지 않아 소금의 염분이 높은 편이다. 곰소염전은 영양분이 많고 깨끗한 바닷물을 사용해 소금이 딱딱하지 않고 쓴맛이 없다. 곰소 젓갈의 맛은 곰소 염전의 천일염에서 나온다. 곰소항 어시장에서도 주꾸미가 거래된다. 젓갈과 함께 먹는 주꾸미는 독특한 맛을 낸다.
글=정상철 기자 dreams@gjdream.com
사진=함인호 ino@gjdream.com
여행쪽지: 가을에 주꾸미가 많이 나면 봄에 생산량이 적다. 올 봄 부안의 주꾸미는 수확량이 적은 편이다. 현재 1kg에 2만8000원에 거래된다. 어민들은 관괭객이 많이 오는 주말을 겨냥해 바다로 나선다. 주말에 가면 조금 더 싸게 주꾸미를 맛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