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세 가지 변화가 발생한다. 신분의 변화이다. 마귀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위치의 변화이다.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에 속하였다가 하나님께서 왕으로 계신 하나님나라로 옮겨졌다. 자원의 변화이다. 자기 계발이든지 뭐든지 간에 자신이 가진 한계 안에서 살아야 하는 현실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가지신 자원을 사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적 한계 안에서 머물러 있지 않고 신적인 차원의 삶이 가능하게 되었다.
세 변화를 통틀어 하나님나라로 압축할 수 있다. 하나님나라, 하나님의 다스림이 그 인격과 삶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죽음 이후에는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언제나 그 시대의 정신이나 그 시대가 추구하는 삶보다 높은 가치를 추구하였다. 구약 시대에는 율법이 그러했다. 하나님 사랑, 내 몸같이 이웃 사랑인 율법은 그 당대의 열방이 추구하던 삶보다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한 것이다. 신약 시대에는 완전하게 된 율법이 그러하다. 예수님같이 하나님 사랑,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과 이웃 사랑이 완전하게 된 율법이다.
신약 정경이 기록될 당시의 교회 모습은 그 당대의 사회 모습과 달랐다. 사회에서는 주인과 종의 신분이지만 교회에서는 한 형제요 자매였다. 사회의 신분이 어떠하든지 간에 교회의 직분은 당사자의 신앙적 인간됨에 의해 결정되었다. 신약 성경이 제시한 직분자의 요건을 충족시키느냐에 의해 결정되었다.
오늘날의 시대정신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 말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정치 체계이고 자본주의는 경제 체계이다. 신자본주의도 자본주의의 울타리 안에 있다. 그것들은 교회가 추구하여야 할 가치인가? 당연히 아니다. 교회가 추구하여야 할 가치는 하나님나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와 민주주의나 자본주의의 어떤 부분이 일치할 수는 있지만 둘은 명백하게 다르다. 하나님나라는 그 둘보다 훨씬 상향의 가치이다. 그 둘이 추구하는 바에서 긍정적인 면을 완전하게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심어 두신 도덕률이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그 결과를 완전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현실의 시대정신과 교회가 추구하여야 할 가치인 하나님나라를 생각하면 후자가 상향 가치이다. 교회가 하나님나라를 추구한다는 말은 시대정신이 추구하는 가치보다 더 상향의 가치를 추구한다는 말이다. 지금 현재에 머물러 있지 않고 더 상향의 가치를 추구한다는 말이다. 이를 진보라고 말한다. 보수는 현재에 머물러 있으려는 것이고 진보는 지금보다 더 상향의 가치를 추구하며 지속적으로 더 나은 모습으로 변화해 가는 것이다.
이남곡 선생의 진보 개념을 생각해 보자. <진보를 연찬하다>에서 이야기된 진보에 대한 개념이다. 진보란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억누르는 물질적 결핍이 주는 억압, 불합리한 제도가 주는 억압, 낡은 의식에서 오는 억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최저로 필요한 물질조차 없으면 고통을 겪는다. 물질을 이용하여 인간을 지배하려는 가진 자에게 매여 고통을 받는다. 과거의 신분 제도, 여성 참정권 차별 등은 불합리한 제도이다. 그때에 낮은 신분과 여성은 억압을 당했다. 똑같은 직장에서 똑같이 일하는데도 월급이 반밖에 안 되는 비정규직의 고통도 불합리한 제도의 산물이다. 이슬람권에서는 여자가 불의하게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했는데도 가족에 의해 살해당하기도 한다. 부르카를 쓰지 않았다고 총에 맞아 죽기도 한다. 낡은 의식으로 인한 억압이다.
이 개념에 의하면 경제 성장을 통하여 물질의 결핍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은 진보이다.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하는 것 곧 구조적인 악을 최소화하는 것은 진보이다. 낡은 의식을 밝혀내고 벗어나도록 돕고 새 의식을 가지고 살도록 하는 것은 진보이다.
하나님나라는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과 온전히 사랑하고 인간 간에 온전히 사랑하며 만물을 바르게 다스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하나님 형상으로서 온전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 사랑, 그분과 같이 서로 사랑하며 만물을 바르게 다스리는 것이다.
하나님나라는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모든 억압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물질적 결핍이 주는 억압, 불합리한 제도가 주는 억압, 낡은 의식에서 오는 억압은 가장 근원적으로 인간의 죄와 죄성의 결과물이다.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억누르는 모든 것도 마찬가지이다. 죄와 죄성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하나님 나라이기에 그 나라를 구함은 죄와 죄성의 결과물인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된다. 물질적 결핍, 불합리한 제도, 낡은 의식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 하나님나라를 구함에 포함되는 것이다.
교회가 진실로 하나님나라를 추구하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그 교회는 진보일 수밖에 없다. 진보가 아닌 보수라는 것은 하나님나라를 저버렸다는 말과 같다. 하나님나라를 저버린 이들이 어찌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산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이 자신들의 죄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자이시라는 고백은 맞겠지만 그분이 자신의 인격과 삶의 주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단지 구원자일 뿐이지 주님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그분이 구원자이시고 스스로가 자신의 주인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을 구원자로는 영접하였지만 그분을 주인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야고보 장로에 의하면 이런 믿음을 악령의 믿음이라고 하였다. 악령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그분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안다. 그렇지만 그분의 뜻을 따르지는 않는다. 그분을 거역한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였지만 예수님을 따르지는 않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입으로 고백하지만 그 삶으로 그분을 거역한다.
야고보 장로는 그런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고 물었다. 그 답은 명백하다. 초등학생 정도만 되어도 그 답은 쉽게 알 수 있다.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구원은 죽음 이후의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죽음을 앞둔 마지막 편지에서 자신이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라고 말한 천국이다. (딤후 4:18)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했고 그분을 따라 살았다.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 삶으로 자신의 고백을 확증하였다. 자신의 마지막을 그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다.
오늘날의 교회가 교회다운가? 전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교회와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하늘 영광으로 가득한 영광스러운 교회와는 전혀 별개이다. 교회를 통하여 사회, 국가가 하나님을 보는가? 전혀 아니다. 사회의 소금이며 빛이라는 소명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 오히려 그 맛을 잃어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히고 있는 형국이다.
어찌하여야 하는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무슨 뜻인가? 성경의 진술이 쓰인 그 당시에 그 글을 받았던 신자들의 이해를 바르게 파악하여야 한다. 그 이해에 담긴 원리를 찾아야 한다. 그 원리를 오늘날에 적용하여야 한다. 그 원리를 오늘날의 현실에 맞추자는 말이 아니다. 오늘날의 현실을 그 원리에 맞추자는 말이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고 말씀하셨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가 있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말씀은 제자들과 여러 군중들을 대상으로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님을 믿었다. 군중들도 병을 고치고 악령 들린 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을 따라와서 그 말씀을 들었다.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 있기 이전의 상황에서 그 당시에 허용된 방식으로 예수님을 믿은 것이다. 공생애에서 예수님은 그러한 이들에 대해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믿는 그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아야 천국에 들어간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율법을 지킴으로 인한 의다.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 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성경 전체에서도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불의하다고 말씀한다. 새 언약이 완전하게 드러나지 않은 시점이다. 옛 언약 곧 율법이 그 중심에 자리 잡았던 시대이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다. 율법 아래 있던 시대에 율법을 지킴으로 인한 의보다 나은 의라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완전하게 된 율법을 지킴으로 인한 의다. 완전한 율법을 지킴으로 인한 의는 율법을 지킴으로 인한 의보다 더 나은 의다.
율법은 그 당대의 시대정신이다. 예수님은 그 시대의 정신보다 더 나은 의를 신자에게 요구하신 것이다. 그 시대의 정신보다 더 나은 의를 가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오늘날의 시대정신은 민주주의이고 법으로 구현되어 있다. 민주주의의 시민이 법을 어기면 불의하고 법을 지키면 의롭다. 국가의 차원에서 보면 그렇다. 이 시대의 의는 법 준수를 통한 의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자유, 평등, 평화, 정의, 인권, 복지, 환경을 추구한다. 그 정도가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그 정도에 있어서 헌법보다 나아야 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진보이어야 한다.
과연 오늘날의 교회가 추구하는 바가 헌법이 추구하는 민주주의의 가치보다 더 나은가? 장로라는 이명박 대통령이 추구하는 바가 헌법이 추구하는 민주주의 정도나 되는가? 양심에 화인을 맞지 않았다면 그 답은 명백할 것이다.
신자,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분을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이 땅에서의 삶은 진보일 수밖에 없다. 진보가 아니라면 그는 예수님을 그 인격과 삶의 주님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나라를 구한다면 그는 진보일 수밖에 없다. 진보가 아니라면 그는 하나님나라가 아닌 자신의 왕국을 만들려는 것일 뿐이다.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이 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실현하려면 패러다임의 변화가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신자라고 하면서도 보수 때로는 꼴통 보수로 가득한 이 땅의 교회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하나님나라를 바르게 이해하고 그 인격과 삶에 적용하며 시대정신보다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그런 신자가 죽음 이후에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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