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기자 2013. 5. 1. 03:54

 

오지호가의 봄

오지호가는 우리지역의 미술계를 대표하는 오지호화백이 1954년부터 거주하면서 창작활동과 후학양성에 힘을 기울였던 화실과 주택이다. 이을 보존하기 위하여 1986년 9월 29일 기념물 제6호로 지정하여 현재까지 보존하고 있고 후손이 거주하면서 관리하고 있다.

 

오지호가에 들어서면 각종 나무와 꽃들이 방문객들을 반긴다. 봄을 알리는 매화를 시작으로 동백, 모란, 자목련, 유채, 딸기, 철쭉 등 꽃들이 만개하여 집안을 화사하게 했다.

 

옛날 전통가옥에 빠지지 않았던 크기가 다른 항아리가 눈에 띈다. 후손이 거주하면서 손수 전통된장, 고추장, 장아치 등을 담궈서 항아리에 저장했다. 특히나 전통다식을 손수 만들어 전통차와 함께 방문객들에게 극진한 대접도 잊지 않는다.

 

서양화의 대가 오지호가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근무 중이던 1954년부터 1982년 타계할 때까지 살던 집인 오지호가는 원래 100여 년 전의 건축물이었으나 퇴락하자 1986년에 전면적인 보수작업을 했다.

 

오지호(1905∼1982)화백은 예술원 종신 회원이며, 국전심사 위원장을 역임한 서양화의 원로였던 오지호는 망국을 재촉하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905년 12월에 화순군 동복에서 오재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오지호는 애국애족의 가문에서 자라면서 미술에 대한 취미와 함께 강렬한 민족주의 정신과 애국심을 키웠다.

 

인상주의의 회화 양식을 받아들여 토착화시킨 화가로 화순 동복 출신이며 휘문고보(徽文高普)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도일유학(渡日遊學) 유화가인 고의동(高義東)과 함께 있었으며 동경 미술학교에 유학했다.

 

1948년 광주에 내려와 정착, 「광주미술연구회」를 조직하는 한편 조선대학교 미술과 교수를 역임했다. 또「전남도전」의 창립과 더불어 지방 미술의 발전을 주도하면 서구상회화 우위의 개념과 이론으로 광주권 화단의 유화 화풍을 고착시켰다. 만년에는 교과서에서 한자를 병용하여 과학적 두뇌를 개발할 것을 강조하는 한자 교육 부활 운동 에 앞장서기도 했다.

 

국전 초대 작가, 심사 위원, 운영 위원, 예술원 회원을 역임했다. 1977년 에는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 1973년 국민훈장 모란장(牧丹章)을 받았다.

 

오지호 가옥의 대문을 들어서면 화실로 사용되었던 채광창이 있는 문간채가 있다. 안채는 초가집인데 정면 4칸, 측면 1칸의 전후퇴집으로 우진각 지붕이다. 평면은 1칸 반의 부엌과 1칸씩의 방3개로 되어 있고, 배면에는 툇마루와 골방이 있다. 부엌에는 살창과 찬장을 복원했으며 판장으로 된 문은 옛날 것을 그대로 달았다. 부연은 대나무로 엮었고, 연목(椽木)은 가늘고 끝을 훑었다.

 

기단은 막돌허튼층 쌓기의 외벌대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전면과 측면에는 네모기둥, 뒷면에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현재의 기둥은 모서리 기둥만을 남기고 원래의 크기대로 복원되어 있으며, 문은 외짝의 띠살문이다. 앞마루도 우물마루를 살리기 위해 부분적으로 보수하였다. 방형기둥 위에는 우미량과 납도리를 결구하였고, 가구는 고주( 高柱)위에 대량을 걸친 뒤 동자주, 종량, 종도리를 차례로 올려놓은 일반적인 구조방식을 적용하고 있다.

화실은 6평 남짓한 크기로 북쪽으로 채광창이 있고, 장마루와 맞배지붕을 한 유럽 스타일의 화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