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리더십
저 자 : 이석훈
출판사 : 북랜드
발행일 : 2003.09.10
[책정보]
이 책은 궁극적으로 리더십 관점에서 본 삼국지의 역사를 개관 정리하였다. 삼국지 전반에 대한 내용요약과 삼국지 주요 영웅의 리더십 역량을 제시하고, 삼국지의 성공한 리더의 모습을 분석하였으며, 삼국지 리더십의 만병통치약은 무엇일까를 알려준다. 리더십의 시대적 의지/사회적 도구와 핵심 역량을 제시하는 책이다.
[목차]
삼국지에 대하여
삼국지 역사 스케치
삼국지 영웅
유비의 리더십
조조의 리더십
손권의 리더십
삼국지의 살아있는 리더십
정성과 사랑, 작은 관심은 리더십의 출발이다
리더의 중심 축은 신뢰형성이다
솔선수범은 리더십의 왕도이다
자격있는 리더
리더십 생명력은 미래준비와 통찰력 있는 의사결정
리더의 엄격과 관용
삼국지와 현국지
삼국지를 이해하면 세상과 미래가 보인다.
● 삼국지를 2번 이상 읽지 않은 者와는 人生을 논하지 말라고 한다.
삼국지 안에 무엇이 있길래, 아니 삼국지가 무엇이길래 이 엄청난 화두를 만들어 내는가?
삼국지 안에는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인생의 「희, 비, 애, 락」과 「흥, 망, 성, 쇠」가 있를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우리의 미래를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려된다.
삼국지는 칠실삼허(七實三虛)라고 한다.
약 3할 정도가 소설적 허구로 재미와 감동을 가미하였고 7할은 실제 역사의 사실에 근거해서 구성되었기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읽을 거리와 교훈을 주고 있다.
● 삼국지가 유구한 역사와 함께 많이 읽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역사의 본체는 리더십이고, 리더는 역사의 중앙에 우뚝 서있고, 역사의 전개는 그 리더의 리더십 발휘에 따른 결과이기 때문이다.
리더로서의 역량 있는 자, 즉 그 시대의 문제 해결 자, 핵심역량을 구비한자가 리더가 되고, 또한 그 리더의 리더십에 의해 역사가 흥망성쇠를 같이 한다.
물론 그 리더의 리더십이 곧 역사로 기록되어진 것이다.
삼국지가 이러한 역사의 법칙을 빠른 탬퍼로 진행시키고 있고 재미와 교훈을 덤으로 주고 있기 때문에 장구한 역사를 통해 회자되고 있다.
특히, 우리에게 더 많은 재미와 감동을 주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ㆍ이야기가 허구와 사실을 넘나들며 재미가 있다.
ㆍ교훈적이며 내용이 드라마틱하다.
ㆍ전략, 정치적 갈등, 권모술수, 처세술의 지혜가 현실성 있게 시대와 장소에 상관없이 인생의 귀중한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ㆍ다양한 리더십을 가진 리더의 모습을 통해 인간관계형성, 문제해결 방법, 의사결정의 다양한 상황을 Case by Case로 간접 경험을 할 수 있게 만든다.
● 득세하는 자와 실추하는 자들을 보고 있으면 삼국지와 현실세계는 너무도 동일하며 삼국지를 통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기대와 함께, 다양한 인생의 모습을 간접 경험 할 수 있다.
따라서 '역사는 진화하지 않고 단지 반복할 뿐이다'라는 말에 공감이 간다.
● 성공과 실패 그리고 승리 방법, 남자의 의리를 통해 이 세상을 들여다 볼 수 있다.
● 권모술수와, 정글의 법칙 등 생존을 위한 다양한 리더들의 리더십 발휘에 공감하고 때로는 분노하며 이 세상을 준비한다. 왜냐하면, 역사는 준비된 자의 것이고, 리더십의 역량은 얼마만큼 준비했느냐가 그 질과 수준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 정황판단과 의사결정 능력을 삼국지 영웅을 통해 유형별 성격을 고려하여 제시하였다.
● 궁극적으로 리더십 관점에서 본 삼국지의 역사를 개관 정리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삼국지 전반에 대한 내용요약과 삼국지 주요 영웅의 리더십 역량 제시
2. 삼국지의 성공한 리더의 모습을 심층 깊게 분석하였고.
3. 삼국지 리더십의 만병통치약은 무엇일까를 분석하였고.
4. 리더십의 시대적 의지/사회적 도구와 핵심역량을 제시하였으며
5. 삼국지와 현국지의 차이점을 제시하였고.
6. 삼국지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를 제시하였다.
7. 삼국지에서 배우는 21C의 리더상을 제시하였다.
디지털시대의 핵심인 「Kiss 전법(Keeps it simple and short)」으로 전관(全觀)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흥미위주, 교훈적 내용을 축으로 리더십 관점에서 분석코자 애썼다.
많은 젊은이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시대의 방향을 제시하고 정확한 목표를 설정하여 몰입할 수 있는 시대적/ 사회적/ 문화적 자신감과 승리자의 쾌감을 맛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준비하였다. 새 시대의 비전을 가진 새 리더가 될 동량들에게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리더십을 삼국지를 통해서 인식하고 신념화되어 국가적으로 쓸만한 역량 있는 리더가 많이 탄생되기를 기대한다.
새 시대의 리더는 세상을 보는 눈과 사람을 보는 안목을 가짐으로써 현 시대의 문제들을 지혜롭고 슬기롭게 극복하여 세계 초 일류국가 건설에 헌신 봉사할 수 있는 진정한 국가적 리더로 거듭나길 기대해 본다.
온고지신(溫故知新) ⋯ 과거 경험을 통해 현재의 난해한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
우리의 관점을 과거로 지향하는 상고주의(尙古主義)가 아닌 과거를 통해 온고지신(溫故知新)하여 현재의 난해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도록 시도하고자 한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리더인 유비와 조조, 손권, 제갈공명의 리더십을 통해 우리의 미래를 가늠하고 새 시대의 승자가 될 수 있는 해법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재미있는 삼국지 리더십 여행을 시작할까 한다. 중국의 역사를 "다스림"과 "반란"으로 표현한다면, 다스림의 시대는 짧고 반란의 시대는 길었다. 3천년 역사의 대부분이 반란의 시대이거나 반란과 함께 하는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만큼 흥미도 있다고 하겠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시대적 베스트 셀러인 삼국지이다. 삼국지는 지금부터 6백 년 전 14세기 말 중국의 나관중이 쓴 대하역사소설이다. 시대 배경은 서기 184년 중국의 후한 12대 영제 때부터 진무제(晋武帝)가 천하를 통일할 때까지 97년 간의 파란만장한 제국의 흥망사이다. 그 시기는 고구려 고국천왕 때부터 백제의 고이왕과 신라의 미추왕 때까지에 해당된다. 삼국지는 후한의 역사가 진수(陳)의 정사(正史)를 나관중이 소설화한 것으로 그 후에도 여러 사람이 삼국지를 써서 중국에서만 해도 삼국지의 판본이 여러 종류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누구의 작품이거나 삼국지의 무대는 광활한 중국 대륙이고 등장 인물은 800백여 명에 이르며 그 장대한 대하 드라마 속에는 국가와 인간의 흥망성쇠가 거대한 벽화처럼 새겨져 있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더구나 삼국지는 세계적으로 성경 다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읽은 베스트셀러 소설이다. 그러나 삼국지의 매력은 단순히 많은 충신과 영웅 호걸들의 음모와 배신과 전쟁의 피비린내 나는 비극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ㆍ군사ㆍ국방ㆍ외교 전략은 물론 오늘날의 개인과 국가에 교과서 같은 지혜와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한때 미육사 웨스트포인트에서도 삼국지를 군사 전략의 교과서로 삼은 적이 있었다.
삼국지의 밑그림 스케치 후한 말, 연이은 어린 황제의 즉위로 말미암아 외척과 환관들이 국사를 농락하는 바람에 나라는 어지러워지고 거듭되는 흉년으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말았다. 당시 환관들이 일으킨 두 차례의 당고(黨錮)의 화(禍)로 관료집단은 도륙당하고, 어린 황제는 십상시(十常時)라고 일컬어지는 열 명의 환관들에게 둘러싸여 꼭두각시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참담한 현실에서 위안을 찾고자 농민들을 비롯한 힘없는 백성들은 태평도라는 종교단체를 찾게 되었고 거록(鋸鹿)출신의 장각(長角)이 그의 동생인 장보(張寶), 장량(張良)과 함께 교단을 이끌면서 정치 세력화하고 스스로를 대현양사(大賢良師)라 칭하였다. 드디어 서기 184년 중평 원년 2월, 장각 자신은 천공장군(天公將軍), 동생인 장보와 장량을 각각 지공장군(地公將軍)과 인공장군(人公將軍)으로 삼고 머리에 노란 띠, 즉 황건(黃巾)을 두르게 하여 총병력 36만에 달하는 황건군(黃巾軍)에게 출진명령을 내렸다. 이른 바 '황건의 난'이 터진 것이다. 당황한 조정에서는 하(何) 황후의 오라비인 대장군 하진(河進)에게 변란을 막도록 하였으나 날로 확산되는 황건의 무리를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다. 장각의 황건적이 유주 땅까지 쳐들어 왔을 때, 유주 태수 유언(劉焉)의 의병을 모집한다는 방을 본 유비는 관우 장비와 도원결의를 맺고 황건적 토벌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삼국지의 주인공이 되는 조조와 원소, 동탁과 손견 등을 만나게 된다. '황건적 난'이 평정되고 논공행상 과정에서 유비는 겨우 미관말직과 다름없는 중산부(中山俯) 안희현(安喜縣)의 현위(縣尉) 자리를 맡지만 조정에서 파견된 독우(督郵)라는 자를 장비가 폭행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자리를 내놓고 수배되는 신세가 되었으나 마침 어양(漁陽)땅에서 발생한 장순(張純) 장거(張擧) 형제의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사면된다. 한편, 황건의 난이 가라앉자마자 다시 기세를 회복한 십상시들과 악착같이 그들의 손아귀에서 권력을 되찾으려는 외척간의 다툼은 '십상시의 난'으로 이어져 결국 두 권력집단은 동반 침몰하게 되고, 그 틈을 타 서량에서 대군을 몰고 낙양으로 들어온 동탁은 정적 정원을 죽이고 그의 양자인 여포를 끌어들여 강력한 일인 독재체제를 구축하여 소제를 폐하고 어린 진류왕을 천자로 내세우니 그가 바로 한조의 마지막 황제 헌제이며, 이로부터 한나라는 멸망의 수순을 밝기 시작한다.
동탁이 정권의 핵심으로 전면에 등장하여 만행을 일삼자 동탁 제거를 구실로 지방의 제후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본격적인 군웅할거 시대가 열리게 되는데, 동탁은 믿었던 화웅이 사수관 싸움에서 관우의 단칼에 죽고 손견과의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자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천도한다. 동탁은 미오에 황궁을 능가하는 화려한 성을 쌓고 어린 천자를 핍박하며 방탕한 생활과 폭정으로 나라를 농락하자 사도 왕윤은 초선을 내세워 동탁과 여포를 이간시키는 연환계를 써 동탁을 제거한다. 그러나 왕윤은 타협 할 줄 모르는 그의 성품 때문에 섬서에 몸을 피하고 있었던 동탁의 부하 이각과 곽사 등의 난을 자초하고 말았다. 한편, 처음 조조의 제의로 시작된 반 동탁 동맹군은 중국 전역에서 모여든 동상이몽의 제후들 때문에 처음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하였다. 불협화음을 조정해야 할 위치에 있는 동맹체의 맹주 원소까지도 그럴만한 인물이 못되었다. 낙양성을 공략한 손견이 난리통에 분실된 전국옥새를 찾음으로써 시작된 원소와 유표, 공손찬과 원소, 손견과 유표의 분쟁 등은 동탁 이후의 본격적인 군웅할거의 예고편이 된다. 이 과정에서 강동의 호랑이라 일컬어지던 손견이 유표를 치다가 36세의 나이로 죽고, 그의 아들 손책이 그 뒤를 잇지만 일단 원술의 휘하에 들어가 때를 기다리게 된다. 한편, 동탁이 죽고 사도 왕윤마저 이ㆍ곽의 무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조조는 자신이 나서야 할 기회를 엿보면서 동군을 발판으로 자신의 세력을 키워간다. 그리고 황건적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도 미관말직에 머물고 반 동탁 동맹군의 공손찬 휘하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던 유비는 조조가 부친 조숭의 죽음을 둘러싸고 서주 태수 도겸과 갈등을 일으킴으로써 뜻하지 않은 첫 번째 기회를 얻게 되는데 이는 조조가 부친의 복수를 위해서 서주를 치자 도겸이 공손찬에게 원군을 요청하고 그 때 유비가 자원하여 서주를 구하겠다고 나섬으로써 시작되었다. 임종을 맞이한 도겸이 유비에게 간곡하게 서주를 맡아줄 것을 유언하자 할 수 없이 태수가 된 유비를 당시 이ㆍ곽의 조정에서는 그의 직위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장안으로의 진출을 노리는 조조를 비롯한 제후들을 적절하게 견제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였다. 한편 이각과 곽사의 무리에게 장안이 함락되던 날, 가까스로 몸을 빼낸 여포가 원소 등의 막하를 전전하다가 신변의 위협을 느껴 방황하던 중 진궁의 건의에 따라 자신의 본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서주 공략에 여념이 없던 조조의 영지를 침범하여 서주로 부터 대군을 철군케 하였으나 연주와 복양을 다시 잃고 유비를 찾아가 의탁하여 소패성에 머물게 된다. 한편, 이각과 곽사는 조정의 충신들의 계략에 빠져 내분을 일으키는 바람에 헌제는 죽음의 도시 장안을 버리고 낙양으로 환도를 하면서 수많은 고초를 겪었으나 낙양 역시 형편이 나쁜데다가 이ㆍ곽의 무리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산동의 조조에게 사직을 보존하라는 황명을 내림으로써 조조의 화려한 중앙정치 무대로의 진입을 초래한다. 천하의 간웅인 조조는 이때부터 천자를 끼고 천하를 도모하려는 수순을 밟기 시작, 두 영웅이 공존할 수 없다는 생각에 유비를 제거하기 위한 계략을 세우고 원소와 원술을 비롯한 영웅들이 조조와 유비를 둘러싸고 복잡한 관계를 전개하게 되는데, 이 무렵 손책도 원술의 둥지에서 벗어나 강동을 발판으로 많은 인재를 모으면서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조조가 천자를 배경으로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가는 사이에 강동에서도 손책이 소패왕이라 일컬어지면서 대업의 기반을 확고히 하고 있었고 수춘성의 원술도 전국옥새가 자신의 손에 넘어오자 스스로 황제가 되고자 하는 무리수를 둠으로써 사방에 적을 만들고 만다. 원술은 눈에 가시와도 같던 소패성의 유비를 쳤으나 여포가 교묘하게 중재에 나서 원술의 선봉장 기령의 군대를 철수시키자 이번에는 여포에게 정략적인 혼사를 제의하면서 유비와 이간시키려는 계략을 꾸미지만 서주성에서 유비를 돕는 진규와 진등 부자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한다. 소패성의 장비가 말을 약탈한 사건을 계기로 유비와 여포는 결정적으로 결별하고 유비는 손건의 건의에 따라 허도의 조조에게 몸을 의탁하게 되는데 이 일은 유비에 있어 가까이에서 조조를 관찰함으로써 향후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를 터득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그것은 조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비는 공존할 수 없는 영웅이니 그를 아예 죽여 후환을 없애자는 책사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일단 자신의 영향권 안에서 유비의 진면목을 관찰하기로 하고 헌제에게 표문을 올려 그를 예주목에 봉하여 서주의 여포를 견제토록 한다. 조조는 허도를 노리는 장제를 치기 위해서 사전에 벼슬과 선물로 여포를 회유하고 난 다음 군사를 휘몰아 갔으나 갑자기 장제가 사망하자 그의 조카 장수는 감히 대적하지 못하고 항복한다. 그러나 여색을 밝히는 조조는 죽은 장제의 처, 즉 장수의 숙모 추씨 부인과의 사랑 놀음으로 인하여 아끼던 장수 전위와 아들 조앙, 조카 조안민을 잃고 조조 자신도 위기에 빠졌으나 가까스로 병력을 수습하여 장수의 군대를 물리친다. 비통한 심정으로 허도로 돌아온 조조는 여포의 제거 계획을 꾸미는데 그때 이미 여포는 원술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고 회남의 원술은 마침내 황제를 칭하면서 자신에게 등을 돌린 여포를 치기 위해서 장훈(張勳)에게 20만 대군을 일곱 길로 나누어 서주로 진격케 한다. 그러나 원술의 대군은 진등의 계략으로 참패를 면치 못하고 회남으로 철군한다. 이에 원술은 분함을 참지 못하고 이번에는 자신에게 군사를 빌린 손책에게 고압적인 자세로 원군을 요청하는 바람에 그나마 비교적 중립적이던 그 마저 적으로 만들어 자멸을 자초하고 만다. 이로써 조조와 유비, 여포와 손책 등은 원술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바람에 수춘성은 잿더미가 되고 원술 자신은 회수를 건너가 몸을 피한다. 조조는 아예 회수를 건너가 원술을 치려고 하지만 마침 유표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던 장수(張繡)가 남양을 도모한다는 말을 듣고 손책에게 서신을 보내어 장강에 포진하고 있다가 장수의 군사를 막고 유표를 공격할 듯한 태도를 취하도록 한다. 한편, 유비에게는 그대로 소패성에 남아 지키게 하면서 여포와는 관계를 개선하여 서로 싸우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이로써 여건이 갖추어지자 군사를 몰아 장수를 치는 과정에서 조조는 소위 '상투 절단 사건'을 일으킴으로써 절묘한 용인술과 민중 통제력을 과시하며 허장성세(虛張聲勢) 등의 전략으로 장수를 공략하나 전략가 가후의 계책에 말려 고전하다가 허도로의 퇴로를 막고 승리를 장담하던 유표와 장수군을 가까스로 물리치고 별 소득도 얻지 못한 채 귀환한다.
삼국지의 영웅
✔ 조조(曹操, 155~220년)
조조는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정치가이자 군인이며 시인이다. 자는 맹덕(孟德),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황제(武皇帝)이다. 후한이 그 힘을 잃어가던 시기에 비상하고 탁월한 재능으로 두각을 드러내, 여러 제후들을 연달아 격파하고 중국 대륙의 대부분을 통일하여 위나라의 기틀을 닦았다. 즉, 조조는 20살에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낭관(?官)이 되고 낙양북부위에 임명된다. 그는 권세를 휘두르고 있었던 건석이라는 환관의 숙부가 금지된 야간 외출을 하자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법을 어긴 자는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가차없이 처벌했다. 이어서 그는 돈구(頓丘)의 현령, 의랑(議郞) 등으로 출세 가도를 달린다. 조조가 서주를 공격하는 사이에 친우였던 장막과 연주를 지키던 진궁이 조조에게 반기를 들고 여포를 연주목에 영입한다. 조조는 복양에서 궁지에 빠지고 메뚜기의 피해로 굶주림에 허덕이지만 2년에 걸친 공방 끝에 마침내 연주를 평정하는 데 성공한다. 196년(건안 원년)에는 헌제를 옹립하여 대장군으로 임명되고 수도를 허창으로 옮긴다. 그와 함께 여러 개혁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같은 해에 조지와 한호(《진서》 선제기에서는 사마의)의 건의를 받아들여 둔전제를 실시해 농경을 전문으로 하는 농민을 널리 모집하여, 허도(허창) 주변에서 농업에 종사시켜 곡물 100만 석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이리하여 전쟁에 없어서는 안될 식량을 충실히 마련하여 천하를 장악할 수 있는 기반을 쌓는다. 이때 유비가 여포에게 하비를 빼앗겨 조조 밑으로 도망온다. 부하 정욱은 “유비는 끝내 남의 밑에 남아있을 인물이 아니다” 라고 말하면서 제거할 것을 진언하지만, 조조는 “지금은 영웅의 마음을 붙들 시기” 라며 유비를 잘 대우한다.
조조는 삼국지의 영웅들 가운데 패자(覇者)로 우뚝 솟은 초세지걸(超世之傑)이라는 평가와, 후한을 멸망시킨 난세의 간웅(奸雄)이자 역신(逆臣)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 한 몸에 받는 인물이다. 《삼국지연의》에 의해 권모술수에 능한 악인으로 저평가되기도 했지만 오늘날에는 시대를 선도한 영웅이라는 재평가의 움직임도 만만치 않다.
✔ 손권(孫權, 182~252년)
손견(孫堅)의 둘째 아들로 200년에 형 손책(孫策)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주유(周瑜) 등의 보좌를 받아 강남(江南)의 경영에 힘썼다. 당시 형주(荊州: 湖北省襄陽縣)에는 유표(劉表)가 세력을 떨치고, 화북(華北)에는 조조(曹操)가 있어 남하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208년 유표가 죽고 그 아들 유종(劉琮)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조조의 압력은 더욱 강화되어 국내에서도 화전양론(和戰兩論)이 대립했으나 주유 등의 주전론이 승리하였다. 이에 손권은 촉(蜀)나라 유비(劉備)와 결탁하여 남하한 조조의 대군을 적벽(赤壁)에서 격파함으로써 강남에서의 지위가 확립되었다. 그 후 형주의 귀속문제(歸屬問題)를 둘러싸고 유비와 대립하였으나, 219년 조조와 결탁하여 유비의 용장 관우(關羽)를 격파하고 형주를 공략하였다.
그 결과 위(魏)·오(吳)·촉(蜀) 3국의 영토가 거의 확정되었으며, 오나라는 장쑤[江蘇]·안후이[安徽]의 남부, 저장[浙江]·장시[江西]·후베이[湖北]·후난[湖南]·푸젠[福建], 그리고 광둥[廣東] 방면까지를 지배하게 되었다. 221년 조조가 죽고 그의 아들 조비(曹丕)가 한(漢)나라의 제위(帝位)를 찬탈하여 황제로 즉위하자 이것을 들은 유비도 촉나라에서 한제(漢帝)를 청하였다. 손권도 이에 맞서서 황제위에 올라 연호를 황룡(黃龍)이라 정하고 도읍을 건업(建業: 南京)으로 정하였다. 그 후는 대체로 촉한(蜀漢)과 결합하여 위나라에 대항하는 한편, 국내의 발전에 힘썼다. 손권은 중국의 삼국시대 오나라의 초대 황제. 안후이, 후난을 비롯한 각 지방의 산월 민족과 그 밖의 이민족을 토벌 진무하고, 타이완, 하이난섬 방면에도 원정군을 보냈으며, 랴오둥의 공손씨와도 접촉을 시도하는 등 국내외의 경영에 노력하였다.
✔ 유비(劉備, 161~223년)
유비는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초대 황제(221년 ~ 223년)로, 자는 현덕(玄德), 시호는 소열황제(昭烈皇帝)이다. 묘호는 열조(烈祖)라 하지만 이는 사후에 사가에서 추존한 것이므로 정식 묘호가 아니다. 전한(前漢) 경제(景帝)의 아들인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삼국지의 흔한 군웅들과 달리 뚜렷한 기반이 결여된 상태에서 짚신 장수로 출발한 유비였지만 한고조의 풍도를 가지고 관우, 제갈량 등 같은 인재들을 등용하여 당대의 패자였던 조조와 끝까지 맞써 제국 촉한을 건국하였다.
215년 형주를 둘러싸고 손권과 대립하였으며, 결국 형주 동부의 강하, 장사, 계양을 오나라에 양보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218년 유비는 한중을 침공해 부하 오란과 뇌동을 무도에 입성시키지만 조조군에게 전멸되고 만다. 유비는 양평관에 주둔하고, 219년 봄 군대를 이끌고 정군산에 진지를 구축해 하후연과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다. 유비는 황충에게 명해 높은 곳에 올라 북을 크게 치게 하고 적군이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해 공격, 하후연을 패퇴시켰다. 이에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한중으로 나섰지만, 유비는 한중을 끝까지 사수하며 상용까지 공략했다. 그리고 같은해 7월 위왕에 오른 조조에 맞서 한중왕에 오른다. 한편 형주에 있던 관우는 위의 조인이 지키는 양양을 공격하다가 손권에게 배후를 찔려 전사했다. 결국 오나라에게 형주를 빼앗기고 만다. 유비는 손권과 동맹을 맺어 적벽에서 조조의 대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유기를 형주 자사로 천거하는 한편, 무릉, 장사, 계양, 영릉 등 4군을 평정하였다. 유기가 죽자 군신들은 유비를 형주목으로 추대했으므로 손권은 유비를 두려워해 자기 여동생인 손상향과 결혼시켜 유비를 동오에 붙잡아두고 유비와 형주를 맞바꾸려 했으나 실패했다.
211년 익주목 유장이 조조의 침공을 두려워하자 유장의 별가종사였던 장송은 유비로 하여금 장로를 토벌하게 하자고 진언했다. 이를 받아들인 유장은 법정을 유비에게 파견했다. 실은 장송이나 법정 모두 유비를 익주의 새 주인으로 맞으려는 사전 포석이었다. 드디어 유비는 부군사 중랑장 방통과 함께 익주로 들어서고, 유장은 몸소 마중나와 맞이했다. 방통은 “이 기회에 유장을 사로잡아야 한다”라고 진언하지만, 유비는 이를 물리친다. 유장은 유비를 행대사마 겸 사예교위로 천거하고 병사를 증강시켜 백수의 주둔군을 지휘하도록 했다. 유비는 곧바로 장로를 토벌하지 않고 은혜를 베출어 인심 장악에 힘썼다.
211년 조조가 손권을 토벌하자 손권은 유비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므로 유비는 유장에게 1만 명의 병사와 군수 물자를 요청했다. 그러나 유장은 병사 4천 명과 요구한 군수 물자를 절반밖에 보내지 않아, 이에 유비는 격노했다. 때마침 장송은 “지금 촉 공략을 앞에 두고 어찌해서 떠나려는 것인가?”라는 내용의 편지를 유비에게 보내는데, 형 장숙이 이 사실을 유장에게 알려 장송이 처형된다. 이때부터 유비와 유장의 사이는 악화되었다. 유비는 백수관을 지키는 양희, 고패를 참살하고 유장을 토벌하러 나섰다. 그러나 낙성에서 격렬한 저항에 부딪쳐 방통이 전사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
214년 유비는 제갈량, 장비, 조운을 이끌고 성도를 포위하고 유장의 항복을 받아냈다. 유비는 익주목을 겸하게 되고, 유장의 옛 신료도 그대로 고관으로 취임시켜 촉한의 기반을 구축했다.
영웅들의 리더십 분석
✔ 유비의 리더십
유비의 리더십은 지극히 동양적이고, 우리의 정서와 문화를 반영하고 강자에게 의연하고 약자에게 약하며 부하의 고충에 동정심을 기초한 거짓없는 진솔한, 너무나도 인간적인 리더로 이미지 되어 있다. 즉, 인성과 성품을 대표하는 리더이며, 정(情)과 신뢰를 가장 우선시 하는 리더였다. 유비의 리더십 특성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① 자식을 돌봐주는 아버지 같은 선천적인 카리스마
유비는 한 왕실의 핏줄을 이어 받았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있었다. 봉건시대 중국에서 이것은 절대적인 우월감을 갖게 했다. 게다가 유비에게는 바다와 같은 포용력과 인자함의 매력이 있었다. 전국난세에는 가문, 무력, 재능, 책략, 배경, 재력 따위가 사람의 성패를 가르는 요소이다. 유비는 그 중 어느 하나도 볼 만한 것이 없었지만 사람을 끌어당기는 흡인력을 갖고 있었는데 이것이 운을 불려 들였다. 이 행운을 불러들이는 흡인력과 앞에서 말한 우월감이 서로 어울려 유비의 신변에는 카리스마다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② 큰 포용력과 꾸밈없는 인간성
카리스마다운 지배력이 있는 지도자는 일반적으로 묘한 종교적인 분위기를 띤 폭군형의 인간이 많지만 유비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양식이 있었고 포용력이 큰 인간이었다. 부하의 재능이나 장점을 흔쾌히 인정해 주었으며 뛰어난 재능이 있는 인간에게는 스스로 낮출 줄 알았다. 이러한 전형적인 사실이 삼고초려(三顧草廬)를 다하여 제갈공명을 군사로 영입한 일이다. 유비는 항상 사람을 부드럽게 대했으며, 부하에게 결코 위세를 부리지 않았으며, 권한을 대폭적으로 넘겨주었고, 세세한 일에 대해서는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 때문에 촉의 신하들은 보람을 갖고 일했으며, 자신의 주군이야 말로 희대의 주군이라 확신하여 모셨다.
③ 결단력이 부족한 리더십
어떻게 보면 허점투성이의 우둔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사실 유비에게는 장점이 많았다. 그는 항상 조급해 하지 않았고 대인다운 풍격이 있었다. 부하에게 곰상스럽게 굴지 않고 탁 트인 솔직한 자세로 사람을 대했기 때문에 상대방의 경계심을 불러 일으키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사실 유비도 상당히 책략가였지만 항상 솔직하게 표현했기 때문에 미움을 받는 일은 드물었다. 이렇게 허점투성이로 보이기도 하는 자세가 보기 드문 대기(大器)라는 유비의 인간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 조조의 리더십
조조의 용인술은 난세에 적합한 유형이다. 상황과 인물, 그리고 문제의 핵심과 본질을 꿰뚫어 보는 남 다른 통찰력과 결단력 그리고 실천력을 겸비한 난세의 영웅이었다. 또한 그는 자신이 보는 확실한 세계관이 있었고 자신만이 볼 수 있는 안목과 해법을 가지고 있었다. 실력을 가장 우선시하는 리더였다. 현대와 같은 변화가 빠른 시대에 효과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리더형으로 생각된다. 삼국지의 영웅 조조의 인간 용인술은 다음과 같다.
① 시대적 의지와 통찰력의 소유자
조조의 리더십은 항상 자신을 중심으로 했고, 리더의 주체성을 모든 것에 우선시켰다. 간단하게 말한다면 극단적인 원 맨(one man)이었다. 젊었을 때 조조는 엉뚱한 오해를 하여 자신을 도우려던 은인 일가족을 몰살시킨 일이 있었다. 동행하던 동료가 그것을 비난하자 그는 당당하게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내가 천하 사람들을 저버리면 저버렸지 천하의 사람들이 나를 저버리게 두지 않겠소!” 자신은 다른 사람을 배반해도 좋으나 다른 사람에게 배반당할 수 없다는 기가 막힌 말이다. 조조의 이 자기 중심주의는 후일 자신에게 칼을 겨누는 자에게는 추호도 용서가 없는 모습이 되어 나타났다.
② 진정한 인재를 볼 줄 아는 통찰력의 소유자
조조는 철저한 재능지상주의자여서 재능만 인정되면 기꺼이 채용했으며 설령 적 진영에 있던 자라도 머리만 숙이고 들어온다면 파격적인 조건으로 영입했다. 때문에 위(魏) 나라에는 뛰어난 무예가, 정략가, 학자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인재의 양과 질에서 월등하게 뛰어나다는 것이야 말로 위가 천하를 차지한 원인이었다. 그리고 조조는 인재를 흔쾌하게 발탁했고 이용가치가 있을 동안에는 철저하게 후대했다.
③ 엄격과 관용을 겸비한 문제 해결자
조조는 사람을 잘 부렸으며 부하들로 하여금 자기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게 할 수 있도록 추켜 세워주고 때로는 채찍질을 하여 분발하도록 격려했다. 그리고 재능이 있거나 공을 세운자에게는 반드시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였다. 그러나 조조는 온정주의자가 아니었다. 조조가 부하를 후대하는 것은 이용가치가 있을 동안 뿐이었다. 원칙적인 오류를 범했을 때, 혹은 충성심에 의혹이 생길 때, 혹은 이용가치가 없어졌을 때는 가차없이 좇아냈다. 설령 그 자가 과거에 아무리 큰 공적을 세웠다고 해도 혹은 그가 동정할 만한 처지에 있었다 해도 냉정하게 좇아냈다. 심할 때는 죽이기 까지 했다. 비정과 엄격이야 말로 조조의 지도력이었다.
④ 매사 솔선수범과 언행일치
조조는 타인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엄격했다. 천하를 다루는 과정에서 그는 몇 번 씩이나 사선을 넘나들며 악전고투를 겪어야 했다. 그 때마다 지휘관인 조조는 항상 병사와 행동을 함께 했고, 솔선수범하여 군율을 지켰다. 재상으로써 정치에 임할 때는 백성의 이익을 먼저 생각했고 자신을 포함한 위정자들이 관료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했다. 때문에 조조가 냉엄한 원 맨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하나 백성들이 그를 잘 따랐던 것이다.
조조는 리더십에 대한 깊은 성찰과 이해가 있었다. 무엇보다 리더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또한 인간의 심리와 문제 해결자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 낸 걸출한 리더십의 소유자 였다. 그러나 철저하게 냉정하고 이기적이었다.
✔ 손권의 리더십
손권은 큰 특징은 없었지만 매우 진실했고 성실한 리더였다, 손권은 삼국 중에서 가장 오랬동안 제위에 머물면서 비록 지방정권이긴 했지만 오나라를 오래도록 안정과 평화 속에서 다스렸다. 창업(創業)과 수성(守成) 중에 어느 것이 어려운가? 라는 질문은 당태종이 왕업에 관해 중신들과 주고 받았던 유명한 문답이다. 창업은 천운(天運)에 따라 결정되지만 수성은 본인의 역량과 성격이 중요하며 운이나 배경이 차지하는 요소는 적다. 눈에 띠는 요란한 행동을 좋아하지 않는 수수한 사람이 수성에 어울린다.
① 조심스러우먀 참을성이 강하다
강남의 소패왕이라던 형 손책과는 달리 손권은 선천적으로 겸허하며 부드러운 마음씨의 소유자였고 인내심이 강했다. 몸을 숙이고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며 연장자나 재능있는 부하에게는 자기를 낮추어 가르침을 구하는, 예사 군주에게서 볼 수 없는 훌륭한 품성을 갖고 있었다.
② 넘버 2의 리더십 소유자
손권의 또 하나의 장점은 넘버 2의 인생철학이다. 그는 정치에 있어서는 성실하게 차선책을 구하고 일보 후퇴 하더라도 무리한 모험을 피하며 객관 정세가 호전되기를 기다린 후에 행동으로 옮겼다. 무슨 일이건 완전무결을 구하면 무리가 따르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학생들로 말하면 ‘수재이지만 결코 1등을 하려고 하지 않는 넘버2 타입 이것이 바로 손권의 진면목이다. 이것이 오래도록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이다. 유하면서도 철저하리만큼 대의를 우선시 했던 리더였다.
③ 신뢰하면 모든 것을 맡기며 인재육성에 열심이었다
‘상대방의 좋은 점을 보고 나쁜 점은 잊으라’. 이 말은 손권이 부하들에게 자주 하던 말이다. 조조와 같은 원 맨이나 형 손책과 같은 무용이 드높은 지도자는 제 맘대로 부하를 부려야만 마음이 편했다. 그러나 얌전하고 온정이 넘치던 손권은 부하를 쉬 믿었으며 일단 믿으면 모든 것을 맡겼다. 젊은 나이에 왕위를 이어 받은 손권은 형이 남겨준 중신들을 그대로 썼으며 특히 주유(周瑜)와 장소에게는 사부의 예로써 대하며 정치와 군사의 대권을 맡겼다. 새 군주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은 중신들은 이전보다 더욱 충성을 바치며 모든 힘을 다 쏟았다.
위와 촉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낀 지방 정권에 불과하던 오가 오래도록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삼국지연의에서 말하는 것처럼 양자강이라는 천험(天險)이 있어 침략을 받기가 어려웠다는 이유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국왕 손권의 훌륭한 지도력도 그 원인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천하제패만 노렸던 조조나 유비에 비하면 넘버2의 인생철학을 갖고 있던 손권의 존재감은 한층 더 희귀함이 느껴진다. 손권은 역사가 진수의 말처럼 예전에 월왕 구천과 어깨를 겨를 만한 뛰어난 자질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손권은 특히 정황 판단능력이 뛰어났고, 그 상황에서 최선의 방책을 선정하여 실천할 수 있는 의지력의 소유자였다. 물론 인재의 등용과 활용면에서 남다른 안목과 부하와 늘 함께 하는 동고동락의 솔선수범과 성실한 인간성이 그에게 있어 큰 장점이었다.
재덕 겸비 자를 선발하라 - 제갈공명 인재관
1. 인사(人事)가 만사(萬事)이다.
경영을 하면서 만나는 옛말 중에서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말이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다"이다. 어느 정도의 규모에 도달하고 나면 최고 경영자가 직접 관리할 수 있는 범위와 능력에는 한계가 나타난다. 결국 인재에 의해 조직을 관리하고, 최고경영자는 인재를 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데 이를 표현하는 영어문장이 "Management is getting things done through the people"이 아닐까?
이러한 능력 즉, 인재를 찾아내고, 인재를 다룰 줄 아는 최고 경영자 역할의 전형을 우리는 삼국지의 인재론에서 발견할 수 있다. 결국 경영은 삼국지로 돌아가는 것인가?
먼저 백락이 있어야 천리마를 알아보는 것처럼, 인재를 다룰 줄 아는 사람만이 인재를 알아본다. 어느 시대나 인재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인재를 볼 줄 아는 사람들이 인재를 발굴하지 못한 것 뿐이다. 인재가 발굴되지 못했던 이유는 인연이 닿지 않았거나 군주가 인재를 쓸 줄 몰랐기 때문이다.
수많은 삼국시대 인재들 때문에, 다른 시대에는 뛰어난 사람들이 눈에 뛰지 않아 조물주가 삼국을 편애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서진(西晉)의 문학가 좌사는 그의 시 영사(詠史)에서 "어느 곳엔들 뛰어난 인재가 없으리요? 다만 초야에 흘려 두고 찾지 않을 뿐." 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인재는 지금 시대에도 존재하며, 인재를 쓸 줄 알고 찾는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이다.
과거에도 천하를 바로잡으려면 인재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에, 군주들은 대부분 예를 갖추어 아랫사람을 대했으며 온갖 방법으로 인재를 모았다. 이러한 시기가 바로 인재들을 수확하는 계절이었고, 능력 있는 인물이 자신을 드러내기 좋은 기회였다. 삼국의 역사가 바로 난세(亂世)에 영웅이 난다는 진리를 증명해준다.
그런데 중국은 삼국시대 외에도 일곱 번 분열이 있었다. 그런데 왜 유독 삼국에만 이처럼 많은 인재들이 등장했을까? 그것은 삼국의 주인인 조조, 유비, 손권의 용인술(用人術)이 특히 뛰어 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삼국의 용인술을 연구할 때 가장 먼저 해야하는 것은 인재를 정확하게 평가하는 법에 관한 것이다. 정확하게 인재를 평가할 줄 알아야 제대로 인재를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삼국지의 인재 경영학을 5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
② 인재를 정확하게 평가하라.
③ 사람이 회사를 만든다.
④ 묻혀있는 인재를 찾아라.
⑤ 패거리를 만들면 분열이 생긴다.
이렇게 『삼국연의』에는 사람을 제대로 알아본 이야기와 용인술에 실패한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기업이 인재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경영자, 그리고 인재를 적절하게 써서 회사의 변화를 시도하려는 경영자들은 꼭 한번 중국 대륙학자인 대만의 곽우가가 지은 『성공하는 리더를 위한 三國志』를 읽어보길 권한다. 그렇다면 삼국지의 인재론 중에서 능력의 파악, 선발 조건, 인재 확보 방법은 어떠했는지 잠시 살펴보자.
2. 인재의 능력 파악에 관한 통찰력
✔ 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을 다양하게 구하라. 그 후에 전체를 파악하고 사람들을 알맞은 때에 알맞은 자리에 배치할 줄 아는 인재를 반드시 구하라.
✔ 사원들을 믿고, 기쁘고 어려운 일을 함께 나누어라.
✔ 사원들을 믿고 그들에게 맡겨라. 그들을 믿지 않으면서 사원들도 리더의 눈치를 보고, 업무 성과도 떨어진다.
✔ 가식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일을 맡기지 마라. 가식적인 사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라.
✔ 리더에게는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가장 중요하다.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리더 곁에는 무능한 사람들만 남는다.
✔ 충고에 귀를 막지 말고, 듣기 싫은 말도 참고 들어라.
박면피(剝面皮)
진의 천하통일은 어떤 측면에서 오의 손호 스스로가 행한 폭정탓에 반대급부로 얻어졌다고 해도 좋을 만큼 그 포학성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 간언하는 신하를 거열형에 처하거나 뜻에 거역하는 궁녀를 참살해서 격류에 던져버리는 등 갖은 학정을 다 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박면피"라는 것도 오제 손호가 얼마나 포악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손호의 잔인성은 마음에 맞지 않는 자의 얼굴을 벗기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그가 진에게 항복하여 낙양으로 끌려갔을 때 진의 실력자인 가충이 "어째서 사람의 얼굴 가죽을 벗기는 짓을 했습니까?"라고 묻자 손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얼굴 가죽이 두꺼운 것이 우선 밉살스러웠기 때문이었소."라고 답변했다.
'면피를 벗긴다'는 것은 파렴치한 자의 면모를 밝혀 수치를 맛보게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른바 낮가죽이 두껍다라든가 뻔뻔스럽다든가 염치를 모른다는 것을 '후안무치'라고 하는데 이것은 '시경' 소아의 교언의 한편에 '교언여황(巧言如簧)은 안지후의(顔之厚矣)'에서 나온 고어로 이것을 좀 새롭게 구성한 것이 '남사(南史)' 변변전에 나오는 '면피후(面皮厚)' 즉 뻔뻔스러운 사람을 두고 얼굴 가죽이 두껍다고 말했다.
도겸의 리더십
서주 태수 도겸은 유비의 인물됨과 영웅스러움, 그리고 덕망을 볼 때 조금도 흠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는 미축을 부르더니 서주자사의 패인을 가져오도록 하였는데, 패인이란 일종의 관인과 같은 것이다. 도겸은 유비에게 서주를 넘겨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비는 정치적 계산인지 진정한 인정인지 완강히 거부한다.
유비는 지금 먹을 때와 먹지 않을 때를 재고 있는 것이다. 주는 것이라고 낼름 잡아먹으면 그 당시에는 좋겠지만 나중에는 집어삼킨 몇 곱절을 게워내야 하며 괜히 인심이라도 잃으면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세월이 흘러 도겸이 병약하고, 상태가 더 힘들어져 죽음의 그림자가 어둡게 드리워지자.
"현덕공 제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 고정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어 서주 태수직을 맡아주신다면 저승길의 큰 위안이 되겠소."
"태수님께서는 두 아드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 분들이 유지를 받들면 되리라 생각합니다."
"현덕공, 그 두 아이가 그럴 능력이 있다면 나도 자식을 키우는 아비로서 자식에게 물려주지 왜 공께 구차스런 부탁을 드리겠소! 맏아들 상이나 작은 아이 응 모두가 재주가 없기는 이 아비와 같소이다. 두 아이의 아비로서가 아니라 이 고장 백성들의 아비로서의 책무가 우선이기 때문에 부탁드리는 것이오."
과연 도겸은 인인군자라 일컬어질 만한 인물이었다.
【관우와 당대 명의 화타(花朶)와의 만남】
관우는 다시 조인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다가 화살에 맞았는데, 화살에는 독이 발라져 있어 화살촉을 뺐으나 독이 뼈 속에 스며들어 오른 팔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전투가 불가능해졌다. 그때 명의 화타가 관우를 찾아왔다.
"먼저 상처를 좀 보겠습니다."
관우는 옷을 걷고 오른팔을 보여 주었다.
"쯧쯧쯧!!! 하필이면 화살촉에 오독(烏毒)이 발라져 있었군요. 이미 독이 뼛속으로 들어가 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팔을 잘라내야 합니다."
"나을 수는 있단 말이오?"
"네, 하지만 너무 고통스러운지라……."
"내가 견디지 못할 것이란 말이오? 얼마든지 견딜 수 있으니 즉시 시술하시오."
화타가 수술 준비를 하는 사이에 관우는 술상을 내오게 하여 자신도 마시고 화타에게도 권했다. 관우는 어느 정도 술기운이 오르자 시작하라고 이르고 마량과 함께 오목을 두기 시작했다.
화타는 인간의 인내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수술을 하였다. 살을 째고 칼날로 뼈를 긁어 독을 제거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모든 사람들이 견뎌내지 못하고 눈을 돌릴 정도였으나 관우는 태연하게 술을 계속 마시며 오목을 두었다.
"여기 오목을 두시던 분, 어디 갔소?"
건너편에서 같이 오목을 두던 마량도 고개를 돌리자 관우가 재촉하는 말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무사히 수술을 마친 화타는 의사를 신뢰하고 몸을 맡긴 관우에게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스스로 처방하고 약까지 지어 주었다.
실력 있고 능력 있는 자들은 자기 살 길 가고, 무능력한 자만 남아서 죽치고 있으니 회사가 잘될 리가 없다.
강유는 제갈공명의 후계자로 실력과 성품을 검증 받은 자였다.
강유가 기산(祁山)에서 피로 목욕할 정도로 분투하며 위나라 명장 등애를 애먹이고 있을 때, 갑자기 유선에게서 온 조서를 받았다. 유선은 조서에서 빨리 군대를 철수시키라고 명했다. 유선이는 조서에서, 강유는 여러 번 전쟁을 벌였는데도 공이 없으니 명령을 내려서 염우로 바꾸라는 환관 황호의 말만 듣고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염우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황호에게 아부하여 우장군(右將軍)이란 높은 관직을 얻은 인물이었다. 황호는 원래 강유를 염우로 대체하려고 했으나, 등애가 군사 통솔력이 뛰어난 것을 보고 염우가 등애의 적수가 안될 것 같자 그만두었다. 대장을 임용하는 것을 이처럼 어린애 장난치듯 했고 직책을 주고 빼앗는 것도 환관의 말 한 마디에 따랐으니, 유선은 정말로 어리석은 군주였다.
쓸만한 인재가 떠난다면,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우리 조직에는 쓸만한 인재가 얼마나 있는지, 인사 정책은 현 시대에 적합한 것인지를 체계적이고 총체적으로 행정요원이 아닌 전문가의 수준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현재 우리 주변에 인재가 떠나고 있고 쭉정이만 남아 있는지 눈여겨 볼일이다.
만약, 우리 주변에 인재가 떠나고 있다면 정녕 그것은 슬픈 일이며, 비전없는 미래가 기다릴 뿐이다.
관우의 단도부회(單刀赴會) - 칼 하나만으로 회견에 나선다
―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든 관우의 배짱
오(吳)의 전선(前線) 사령관 노숙(魯肅)은 촉(蜀)의 형주(刑州) 경비 사령관 관우와 회견하기로 했다. 노숙은 관우에게 회견의 조건으로, 첫째 서로의 호위 병사를 백 보씩 물러가게 할 것, 둘째 서로 칼 한 자루만 휴대할 것, 두 가지를 제안했다.
아들 관평(關平)이 물었다.
"노숙이 만나자고 한 것은 틀림없이 어떤 함정이 있기 때문일 것인데 아버님은 왜 그 제의를 받아들였습니까?"
그러자 관우는,
"내가 어찌 그의 속셈을 모르겠는가. 분명히 제갈근(諸葛謹)이 돌아와 손권(孫權)에게 '관우는 형주의 세 군(郡)을 돌려주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보고했기 때문에, 손권이 노숙에게 명하여 나와 만나 형주를 돌려 달라고 요구할 작전일 것이다. 만일 내가 가지 않는다면 그들은 나를 겁쟁이라 선전할 것이다. 회견 때 나는 부하 10명만 데리고 배를 타고 가서 칼 하나만을 차고 회견에 임할 것이다. 그리고 노숙이 어떻게 나오는지 두고 볼 것이다."
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적벽(赤壁)에서 승리한 후 유비는 형주 지구를 점령하고 맹장 관우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게 했다. 이에 놀란 손권은 공명의 친형인 제갈근에게 명하여 촉나라의 의사를 타진케 했으나, 수비 사령관인 관우가 절대로 땅을 돌려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에 육구(陸口)에 주둔하고 있던 노숙에게 명하여 관우와 담판을 하게 했다.
노숙은 관우에게 사령관끼리의 회견을 제의했다. 더구나 장소는 오나라 군사의 진지인 육구, 또 호위병은 거느리지 못하게 하고 휴대할 무기도 칼 한 자루에 국한시키자고 했다.
촉나라 군대는 그것이 함정이라고 판단했다. 만일 그렇지 않더라도 관우가 단신으로 적진에 간다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아들인 관평을 비롯하여 모든 막료들이 반대했다. 그러나 관우는 위험한 줄 알면서도 노숙의 요구에 따라 청룡도(靑龍刀) 한 자루만 가지고 단신으로 적진에 들어갔다.
이것은 관우의 용기를 칭송하는 에피소드로서 소설이나 연극의 유명한 장면이 되고 있다. 그런데 노숙의 고심에도 불구하고 이 교섭은 실패했다.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이러한 마인드가 필요하다고 사려된다.
어차피 지금의 시대는 보장받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직장을 들어갈 것이 아니라, 내가 사장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전략이 필요한 시대임에 틀림없다.
지금은 절약(節約)이 아닌 전략(戰略)이 필요한 시대이다.
외국에 가보면 중국인은 경쟁력 있게 살아가고 있다.
세계 어디를 가도, 중국인은 생존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어디에서나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다름아닌 음식 만드는 기술로 시작하여 부를 축적한 후에 수순을 밟아 기반을 닦은 후에 돈이 되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비전있는 사업으로 확장해 나간다.
그들의 이러한 억새같고, 잔디같은 생존력의 뒤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리라 생각된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를 자문했을 때, 그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그 무엇도 없다면 강한 의지라도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리어카에 배추를 싣고 다니면서 팔 수 있는 의지력이 있어야 우리는 당당하면서도 의연(毅然)하고 정당하고 철학 있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사려된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그 어떤 기능이 있다면 우리는 상당히 큰 폭에서 행복감을 누릴 수 있고, 진정한 자유의 상태에서 생을 영위할 수 있으리라 보여진다.
조직에서 생존하기 위해 허리 숙이고, 진출하기 위해서 고개 숙이는 일이 한여름 뙤약볕에서 밭일하는 것보다 힘들다고 했다.
우리는 1차적 생존적 기능을 가질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는 시대가 왔음을 인식해야 할 때다.
이것이 없으면 철학도 없고, 진정한 리더십도 없다.
무위(無位)의 리더십이 진정한 리더십이고 최고 수준의 리더십이라 확신한다.
수인사 대천명(修人事待天命)
관우가 조조를 화용도에서 놓아주고 왔을 때, 유비의 간청으로 관우를 살려준 제갈량이 유비에게 "아직 조조는 죽을 때가 안됐기 때문에 관우로 하여금 과거 조조에게 입은 은혜나 갚으라고 유독 그를 화용도로 보낸 것" 이라고 하면서, 그러나 자신은 다만 인간으로써 할 수 있는 모든 도리를 다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 표현으로 밝히고 있다.
관우의 죽음
관우는 유비가 장판 싸움에서 위기에 몰려 있을 때 유기로부터 군사를 빌려 구원을 나섰을 때 살았다면서 환한 미소를 짓던 미방의 얼굴이 떠올랐다.
"미방이 나한테 그럴 수는 없어! 아니, 잘못 전해진 말일거야……. 익덕도 한때 날 배반자라고 오해한 적이 있었거든, 형님을 배반했다고 말야. 으흐흑!!"
상처가 도진 데다가 밀려오는 충격을 견딜 수 없었던 관우는 또 다시 혼절하고 말았다. 좌우에서 관평과 주창, 그리고 요화 등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앞으로의 대책을 상의하는 것을 꿈을 꾸듯 들으면서 관우의 두 눈에서는 주르르 희한의 눈물이 흘러 나왔다. 이제 현실을 인정해야 할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관우가 가느다랗게 눈을 뜨며 모두 모이라고 하였다.
"모든 것이 후회막급하다. 모든 일이 잘못 되었어! 봉화대를 너무 믿어버린 것도 나의 불찰이었다. 내가 육손을 너무 깔보았어, 여몽의 잔꾀에 속아넘어 가다니……. 한중왕 형님 전하를 무슨 낯으로 뵌다는 말인가!"
관우는 마량과 이적에게 형주의 위급함을 알리는 보고서를 주어 성도에 파견하는 한편, 군사들을 수습하여 형주를 탈환하기로 하였다. 여몽은 관우의 군사들을 상대로 심리전을 폈는데, 형주에 있는 가족들은 여몽과 손권이 한결같이 잘해주어 관우가 형주를 다스릴 때 보다 잘먹고 잘산다는 식으로 선전함으르써 진영을 이탈시키고자 하였고, 또 그 작전은 성공하였다. 형주의 군사들의 대부분인 관우의 군대는 여몽의 계략으로 속속 이탈하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겨우 몇 백으로 줄어들었다. 관평이 말했다.
"아버님, 이 인원으로 형주를 되찾겠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오히려 아버님의 몸이 상할까 두려우니 일단 맥성(麥珹)에 의지하여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구원병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관우는 비교적 가까운 상용(上庸)에 주둔하고 있는 유봉과 맹달에게 요화를 보내어 구원병을 요청하였으나 그들은 관우와의 개인적 감정으로 위기에 몰려있는 관우를 돕지 않았고 그러는 사이에 오나라의 군사들은 맥성을 에워싸고 포위망을 좁혀 들어갔다. 유봉과 맹달이 도와주지 않자, 요화는 별 수 없이 성도를 향해 말을 달렸다. 눈이 빠지게 구원병을 기다리는 관우!
이제 식량도 바닥나기 시작하였다. 그때 제갈근이 손권의 명으로 관우에게 항복을 권해보려고 맥성을 찾아왔으나 한 마디로 잘라말했다. '형주와 운명을 같이 하겠다'고 말이다.
하룻밤이 지나면 병사들의 수가 줄어갔다. 여몽의 심리전에 말려 탈영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처음 맥성에 들어올 때는 육백 명에 가까웠으나 지금은 삼백 명으로 절반이 줄었다.
"이제 이곳을 포기하고 서천으로 몸을 피할 수밖에 없습니다. 훗날을 기약하시고 어서 이곳을 탈출해야 합니다."
관우는 이에 따르기로 하고 탈출을 시도하는데, 여기서 또 실수를 하고 말았다.
자만심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왕보와 조루는 서천으로 통하는 북쪽 사잇길에는 틀림없이 매복병이 있을 것이라 충고하였으나 관우는 '매복병'이라는 말에 콧방귀를 뀌면서 굳이 그 길을 택하였다. 어떻게 보면 관우는 자만심과 자존심을 구분하지 못했던 것 같다. 스스로도 너무 적을 얕잡아 보았기 때문에 참담한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어 째서 그 길을 택했느냐 그것이 알고 싶다. 아니면 ≪삼국지연의≫의 저자들이 관우라는 인물을 영웅시하는 과정에서 모순을 낳았거나. 이 말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관우의 용감성을 부각시키려다 보니 일단 몸을 피하고 훗날을 기약하겠다는 것과 모순이 생기고 따라서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냈다는 관운장의 쓸데없는 자만심으로 이어 졌다는 말이다.
≪삼국지연의≫를 읽다보면 이런 모순들이 많이 나온다. 아무튼 관우가 뜻을 굽히지 않자 왕보와 주창은 남아서 맥성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하고 그날밤 관우는 관평과 조루, 그리고 이백여 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맥성을 빠져나와 매복병이 우글거리는 북쪽을 향해 내달았다. 관우의 자만심을 이용한 여몽의 전략이 맞아 떨어지는 순 간이었다. 20여 리를 달렸을까? 산을 구비돌아 분지 앞에 이르렀을 때 징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더니 오나라 군사들이 떼거지로 우르르 몰려 나왔다. 적장은 주연(朱然)이었다.
리더는 직언할 수 있어야 한다
리더십은 그 조직의 문화와도 상당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에서 좋은 결과를 가져온 제도가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일본에서 먹히는 상식이 한국에서는 예의 없는 파렴치한 짓이 될 수가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정서 문화중 커뮤니케이션 방법과 토의 문화일 것이다.
나와 반대 의견을 제시하면 철천지 원수가 되거나, 형편없는 사람으로 결정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바른 말하면 온전치 못하기 때문에 애써 바른말하려 하지 않는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가잖아!"가 대표적인 예이다.
문제의 본질은 분명 있는데, 목이 하나라서 직언을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바른말 하는 자, 직언하는 자, 기분은 유쾌하지 않겠지만 그들을 중히 여기고 자유롭고 개방되고 수평적 커뮤니케이션과 토의 문화가 정착이 안되면 우리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많은 크고 작은 문제가 성숙하지 않은 커뮤니케이션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글쎄, 저놈이 말을 함부로 하잖아요. 아니면, 저놈이 나를 아주 무시하잖아요."
"저 사람이 반말 찍찍하잖아요"이다.
성숙하지 못한 모습들이다.
한 국가가 망할 때는, 소인배들이 서로 정권을 차지하고 싸우고 내 밥 그릇 큰 것으로 바꾸려고 이전투구를 불사한다.
상대적으로 충신은 자의든 타의든 세상을 등지고, 그렇지 않으면 재앙을 맞는다.
이러한 현상이 표출되는 단계에 이르면 국가는 철저하게 망가지는 사다리로 올라가 결국 넘지 못할 강을 넘어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사지(死地)로 쳐박는다.
촉나라도 그랬고, 베트남도 그랬고, 백제와 오나라가 그랬다.
유선이 환관 황호를 총애한 것처럼 오나라의 손호 역시 중상시(中常侍) 잠혼을 총애했다. 유선과 손호는 성격은 서로 다르지만, 사람을 쓰는 방식은 같았다. 유선은 어리석어 황호에게 놀아났고, 손호는 똑똑하고 결단력이 있었지만, 사람됨이 잔인해 충신을 마구 살해해서 가까운 사람들이 그의 곁을 떠났고 잠혼 같은 간신들만 남았다.
이런 간신들은 재주도 없고, 나쁜 일을 골라 하는 패거리들이므로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손호의 잔인함은 유선 못지 않았고, 잠혼 역시 황호보다 더 간사하고 사악하고 악행을 일삼았다. 이렇게 폭군과 간신이 한 무리가 되어 나라를 휘두르니 오나라 정치는 훨씬 못했다. 그러니 오나라 백성들이 얼마나 살기 힘들었겠는가.
옛부터 부실하고 무능한 리더를 만나면 국사는 완벽하게 망가지고, 그 댓가는 고스란히 민초의 몫이 되고만다.
임진왜란(1592년 선조)이 그랬고, 한일합방이 그랬고, IMF가 그랬다.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충신의 직언에 귀 기울여야 현재의 문제가 해결된다.
개방적이고 수평적이고 투명하며 정직한 커뮤니케이션과 토의문화가 정착이 안되면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뿐더러 훗날 역사가 그러했듯이 엄청난 댓가를 치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부하가 하는 말에 진지하게 들어주고, 그들의 작은 충고에 고마워해야 한다.
'성공으로 가는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쉽잖은 인생입니다! (0) | 2010.04.06 |
---|---|
변화의 원리 (0) | 2010.04.06 |
성공을 꿈꾸는 비즈니스 (0) | 2010.04.02 |
부부싸움도 때로는 약이 되기도 (0) | 2010.03.13 |
한계는 스스로 만들어낸 발명품 (0) | 2010.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