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면 기사

안선재로 다시 태어난 영국 사람 안토니

신문기자 2010. 6. 6. 14:27
안선재로 다시 태어난 영국 사람 안토니
인터뷰 … 안선재 서강대 명예교수

얼마 전 서울시립대에서 진행됐던 노숙인들을 위한 인문학 특강에서 푸른 눈을 한 외국인이 유창한 우리말로 강의했다. 바로 한국인으로 귀화한 안선재 서강대 명예교수였다. 옥스포드대 출신으로 종교적인 사명을 띠고 한국에 온 이래 서강대에서 오랫동안 영어영문학을 가르치고 특히 한국 문인들의 작품을 세계에 알리는 전도사역을 해온 그를 지난 5월 25일 오후,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연구실 벨을 누르자 밝은 세로줄 무늬 와이셔츠에 넥타이 차림의 전형적인 서구 노신사가 문을 연다. 그가 바로 내민 악수에 첫 만남의 어색함도, 찌푸린 날씨가 주는 어두움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병풍이 된 삼면의 서가에는 국내외 책과 자료가 빼곡히 채워져 있다. 천정과 창문을 뺀 사방에도 책과 액자, 도자기가 제각각 자리를 잡았다. 벽면의 ‘茶禪一味’, ‘不欺自心’이란 붓글씨 액자를 보니 이 방의 주인공은 예사 분이 아닌 듯하다. 다향을 머금은 다기들이 한가롭다. 커튼이 젖혀진 유리창엔 늦은 오월 하늘이 들어와 있었다.

“한국에 온 지 삼십년밖에 안됐어요. 짧은 기간입니다. 1942년 1월 3일에 태어났지만, 음력으로 치면 1941년 생이죠.” 안선재 교수는 올해로 68세. 한국 생활 삼십일년 째지만 전혀 길지 않다고 말할 만큼 한국을 사랑하는 느낌이 들었다.

혹독했던 입국 신고식, 최루가스 세례도 금방 익숙해졌어요

“1977년 떼제공동체 일원으로 홍콩의 아주 가난한 지역에 머물고 있었죠. 그 때 홍콩에 들렀던 김수환 추기경님과 우연히 만나게 됐어요. 같이 기도하고 식사를 나누었지요. 추기경님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보다 깊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떼제의 수사들을 한국에 파견해 달라고 했지요." 그가 말하는 떼제(Taize)는 프랑스의 한 작은 마을 이름이자, 1940년 만들어진 남자 수도자 공동체의 이름이기도 하다. 당시 전쟁으로 양분된 프랑스의 분계선에 가까워 전쟁 난민을 보호하기에 좋은 위치였던 이 마을은 어느덧 여름방학이면 세계 80~90개국의 젊은이들이 몰려와 일주일 간 삶의 의미를 깨닫고 나눔을 체험하고 돌아가는 순례지가 되었으며, 지금도 세계 30개국 출신 1백여 명의 수도자들이 개신교, 성공회, 천주교 출신을 가리지 않고 공동체 생활을 하는 곳이라고 한다.

"1980년 5월 7일, 한국에 왔을 때, 한국은 민주주의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대학생들의 데모가 심했죠. 많은 최루가스도 나중에는 익숙해졌어요. 바로 서강대에서 강의를 맡게 되고, 2007년 퇴임 때까지 영어영문학을 가르쳤습니다. 두 차례 학과장도 했어요.” 그는 밝게 웃으면서 색다르게 치른 혹독한 입국 신고식을 기억해냈다. 입국한 지 10일 후,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대학교는 학생 데모로 최루가스가 자욱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성장통을 앓던 시기였다. 서가에 놓인 고 김수환 추기경의 낯익은 사진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돌아가신 김 추기경님은 한국과 인연을 맺게 해 주셨고, 한국생활에 기본이 되는 집도 빌려 주신 분이죠. 지금 살고 있는 집도 그 때 것입니다."

영문학을 전공한 안교수가 어떤 계기로 영문 번역을 시작하게 됐는지 궁금했다. “한국도 영문학을 일방적으로 수입만 해서는 안 됩니다. 국문학도 다른 언어문학 세계와 주고 받아야 합니다. 한국에 10여 년 살다 보니 어느 정도 번역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날 영문과 교수가 구상 선생님을 잘 안다고 해서 만났죠. 그래서 구상 시인의 시를 번역했죠. 서울대 교수이자 시인인 고 김영무 교수가 추천한 고은 시인의 시도 번역하게 되었죠. 우연한 기회에 해외 출판사를 알게 되어 고은 시인의 1990년대까지의 시선집인 [Flowers of a Moment]를 미국에서 출간함과 거의 동시에 미당 서정주 시인의 1960년까지의 시집 4권을 영국에서 출간했어요. 시 번역은 언어의 함축성 특성상 긴장감(tensity)이 있어 어렵지만 하루 한 편 정도는 번역할 수 있었고 재미있었어요. 지금까지 고은 시인의 [화엄경 Little Pilgrim], 김광규 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Faint Shadows of Love], 천상병 시인의 [귀천 Back to Heaven], 서정주 시인의 [밤이 깊으면 The Early Lyrics], 김수영, 신경림 시인의 작품과 이문열의 소설 [시인 The Poet]도 번역했어요.” 과연 그는 한국 문학의 해외 전도사로 불릴 만했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과 함께 그의 영문 번역은 명성을 더해 갔다. 1991년 대한민국 문학상 번역 부문 대상, 1995년 대산문학상 번역상, 그리고 1996년 한국펜클럽 번역상을 수상했다. 그는 무려 26권의 한국 시와 소설 영문 번역서를 냈다. 특히 천상병 시인의 [귀천 Back to Heaven]은 가장 잘 팔리는 시집으로 미국에서 출간되고 국내판은 1996년 초판 이래 금년도에 21쇄를 기록했다. 2008년 10월 한국 정부는 문화 활동을 통한 국민문화 향상에 이바지한 공로로 그에게 옥관문화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2007년 정년퇴임 이후에도 여전히 그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으며, 금년에는 고 김영랑 시인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Until peonies bloom] 시집 번역을 마쳤다.

그러나 그의 한국 사랑은 비단 문학 작품에 그치지 않았다. “한국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 중 하나는 산입니다. 이번 토요일에도 화엄사에 가서 한국 차를 만드는 과정을 체험합니다. 화엄사 근처 야생차는 4-5월에 좋죠.” 어디 한국차뿐이랴. 그는 한국적인 것을 모두 좋아하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인 사고와 행동을 갖고 있었다. “한식 세계화를 말하는데, 사실 한국의 절 음식이나 시골 음식만큼 좋은 음식도 없지요.” 홍어찜, 매생이국, 산나물, 청국장을 좋아하는 그는 한국인들이 자기 음식에 대해 자신이 없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외국 사람이 오면 햄버거와 스파게티를 권합니다. 비빔밥을 먹겠다고 하면 너무 매우니 고추장 넣지 말라고 하구요. 해외 가면 한국식당 찾는 자신들처럼 외국 사람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정작 그들은 한국적인 것을 체험하고 싶어하는데요.”

안교수는 한국인들이 한국적인 것의 아름다움이나 가치에 대하여 너무 모른다는 점을 여러 번 지적하였다. “옛날 서울 모습을 찾아 보기 힘들어요. 북촌 한옥마을에 가야 한옥을 볼 수 있어요. 구라파는 중심 시가지에도 역사적 옛 정취가 그대로 남아 있어요. 한옥 불편해서 아파트로 옮겨간다고 하죠. 한국 역사교수들도 전통 문화에 대한 이해와 보존에 대하여 일반인처럼 생각하는 것을 봅니다. 외국인들은 세계문화유산인 국악과 판소리를 좋아하는데, 정작 한국인들은 10분을 채 못 들어요."

한국사람 안선재, 한국인들에게 고함

그리하여, 그는 한국인으로 귀화하였다. “1994년입니다. 법무부 담당자가 귀화하는 여러 방법(결혼이나 입양)이 있는데 선생님처럼 이 나라를 사랑했기 때문에 하는 경우는 처음이라 했어요. 귀화 요건 중 시험은 만점 받았어요. 면접은 질문 딱 하나를 물어 봤습니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느냐?’였어요. 그러지 않을 거라고 말했죠. 영국 공항에 입국할 때 영국인도 EU국가 사람도 아니어서 외국인 줄에 서서 기다려야 하는 불편은 있어요.(웃음)”

그렇다면 안선재라는 한국 이름은 어떻게 지은 것일까? “당시 고은, 구상 등 지인들이 한국 이름을 지어 주려고 했지요. 'Anthony'의 한국어 발음 ‘안서니’와 비슷한 ‘안선희’를 생각했으나 여자 이름 같다고 해서 다른 이름을 찾게 되었죠. 그러다가 번역 중이던 [화엄경]에 나오는 선재동자(善財童子)의 ’선재‘를 선택하게 되었어요. 불교의 모범적인 구도자인 선재동자는 세상을 돌아다녔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스승(53善知識)으로 모시고 지혜와 깨달음을 얻는 어린 나그네죠. 수도자로서 저와 비슷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안교수는 대화 도중 떼제공동체에 대해 강조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한국인 지인들 상당수가 기독교인들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불교도 좋고 불교인도 좋아합니다. 저기 벽에 있는 액자(茶禪一味)도 법정 스님이 살아 계실 때 주신 거죠.” 현관 입구에 있는 '不欺自心 (자신의 마음도 속이지 마라)' 족자도 고 성철 스님의 글이었다. “불교 스님은 우리 수사와 비슷합니다. 출가해서 독신으로 살고 규칙에 따라 공동생활을 하는 점이 똑같아요.” 종교적 편견이나 이념적 갈등은 그와의 대화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같은 문화 속에 사는 진정한 한국인을 만난 기분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한국적 아름다움과 가치는 세계적인 것이며 이를 잃는 것은 세계 인류가 유산을 잃는 것이라는 그의 생각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그의 한국 문화와 전통에 대한 이야기는 시간가는 줄 모르게 끝없이 펼쳐졌다.

영국에서 태어나 프랑스와 필리핀을 거쳐 온 한국인 나그네 안선재. 그의 삶이 아름다운 순례자의 길이 되길 진심으로 빌어 본다. 인터뷰를 마치고 받았던 그의 번역서 [귀천 Back to heaven]을 펴고 시인처럼 자유롭게 상상해본다, 먼훗날을. ‘아름다운 이 세상(한국)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At the end of my outing to this beautiful world(Korea), I'll go back and say: It was beautiful)…….'

 
 시민기자/장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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