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사가이며 조선조 제26대 임금이자, 대한제국 첫 황제인 고종이 즉위 전 12세까지 살았던 운현궁에서 지난 5월 30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고종 명성후 가례' 재현행사를 개최했다. 벌써 1시부터 무료 관람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많은 관람객들이 운현궁을 일찌감치 둘러본 후 주최측에서 마련한 의자와 돗자리까지 빼곡하게 앉아 행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식전행사로 한국전통문화연구원 무용단의 검무, 춘앵무, 태선무, 처용무 등의 전통무용의 특별공연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궁 밖에서는 고종황제가 가례를 치르기 위해 인사동을 지나 운현궁으로 향하는 어가행렬이 당도하여 도심 한복판을 위엄 있고 화려한 물결로 넘실대게 했다. 왕실의 혼례인 국혼에는 가례와 길례가 있는데, 가례란 왕을 비롯한 세자와 세손 등 왕통을 이어갈 분들의 혼례를 말하고, 그 외 왕족과 공주의 혼례를 길례라고 한다. 국가적인 중대한 의식이기 때문에 그 절차와 격식이 엄격하고 복잡하여 여러 달에 걸쳐 수 천 명의 인원이 동원되는 것이 보통이다. 가례 절차는 간택된 왕비가 머물고 있는 별궁으로 대궐에서 사자(使者)를 보내 청혼하는 의식인 납채(納采), 혼인이 이루어지게 된 징표로 대궐에서 사자(使者)로 하여금 별궁에 예물을 보내는 납징(納徵), 길일을 택해 가례일로 정하여 이를 별궁에 알려주는 고기(告期), 대궐에서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과 별궁에서 사신을 보내 왕비를 책봉 받도록 하는 의식인 책비(冊妃), 국왕이 별궁에 가서 왕비를 맞아들여 대궐로 돌아오는 의식인 친영(親迎), 국왕이 왕비와 서로 절을 나눈 뒤에 술과 찬을 나누고 첫날밤을 치르는 의식인 동뢰(同牢) 등의 육례를 순서대로 진행한다. 사실 육례는 열흘 이상 걸린다고 한다.
이번 행사는 고종 즉위 3년(1866년) 되는 해에 간택으로 왕비에 책봉된 명성후 민씨가 별궁인 운현궁 노락당에 거처하면서 궁중법도와 가례절차를 교육받고, 그해 3월 21일 거행된 15세의 고종과 16세의 명성후 민씨의 국혼례를 재현하는 행사다. 고종황제가 가례를 치르기 위해 운현궁으로 가는 어가행렬에 이어 명성후가 왕비로 책명 받는 '비수책' 의식, 마지막으로 고종이 왕비를 맞이하는 '친영례' 의식 순으로 진행됐다. 두 의식은 실제로 이틀에 걸쳐 열리는데 이날 행사에서는 1, 2부로 나눠서 바로 이어 재현했다. 드디어 운현궁에 당도한 국왕의 사신을 맞이하는 흥선대원군이 사신 일행과 함께 입장한다. 왕을 대신하여 정사(正使)가 교지를 상궁에게 전달하고 있다. 왕비에 책봉되는 여흥 민씨 민자영이 상궁들의 부축을 받으며 입장한다. 먼저 북향하여 궁궐에 계신 국왕께 사배의 예를 표한 다음, 교지와 죽책문(책봉문), 수보(도장)를 전달 받는다. 상궁이 민자영을 왕비에 책봉한다는 교지를 읽는다. 왕비에게 교지를 전달하는 상궁들, 죽책문을 낭독하는 상궁, 왕비의 권위를 상징하는 수보를 담은 인수함을 전달받는 왕, 왕비 책봉을 감사하며 북향하여 국궁사배를 올린다. 대궐에 계신 국왕께 절을 올리는 왕비, 자리에 앉아 상궁들의 하례를 받은 왕비는 책봉의식을 마치고 퇴장한다. 친영례를 기다리며 왕비와 상궁들이 이로당으로 퇴장한 이후 무대 위에서는 화려한 의상과 춤, 그리고 아악이 어우러진 멋진 궁중정재(宮中呈才)가 펼쳐졌다. 의상이 봄날처럼 환하다. 이로당을 기웃거렸더니, 명성황후 역을 맡은 예고 1학년 김유림 학생이 무거운 가채를 잠시 내려놓고 쉬고 있으면서도 관람객들에게 미소를 보내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고종의 어머니인 여흥 부대부인 민씨도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부대부인의 당부말을 유림 양이 새기고 있을까? "힘쓰고 공경하여 밤낮으로 시부모님의 명을 거역하지 마세요."
2부 행사로 임금이 친히 운현궁으로 와서 기러기를 전달하고 왕비를 궁궐로 모셔가는 친영례를 거행한다. 흥선 대원군이 임금을 영접하러 나가고 있다. 운현궁에 도착한 고종이 큰 가마에서 내려 작은 가마로 갈아타고 입장한다. 왕비도 친영례를 치르기 위해 입장한다. 단에 오르는 왕비가 임금과 마주서고, 먼저 임금이 왕비에게 읍례를 하면 왕비 또한 답례를 한다. 왕과 왕비에게 기러기를 전하는 전안례를 마친 다음, 신하들이 축하의 인사로 임금과 왕비께 국궁사배의 예를 올린다. 모든 행사를 마치고 임금과 왕비가 퇴장한다. 준수한 외모의 왕과, 수줍음과 명석함이 적절하게 표현된 왕비의 그 화려한 행렬이 쓸쓸하고 슬퍼 보인다. 그 동안 방영되었던 명성황후 관련 드라마, 뮤지컬, 그리고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에서 수애의 모습까지, 배우들의 모습도 한꺼번에 떠오르면서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고 먹먹해진다. 운현궁 마당은 남녀노소, 국내인, 외국인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로 가득 찼다. 꽃담과 박쥐 문양의 기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일본인 가이드,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오늘의 이 가례식을 어떻게 설명할지……. 강원도에서 여행 왔다는 와수초등학교 4학년 이창민 외 8명의 학생들, 김포에서 온 어린이기자 강지현 학생, 광명에서 텔레비전 광고를 보고 서둘러 오셨다는 70대 할머니들, 운현궁 부근 운니동에 살아 행사 때마다 오신다는 85세 할머니와 같은 동네 할아버지들 그리고 여기저기서 가족나들이로 나선 관람객들이 많아서인지 귀여운 아이들을 만났다.
모란꽃이 활짝 핀 운현궁의 봄을 기웃거리다가 '고종 명성후 가례' 행사 소식을 알게 돼, 집안 언니들의 결혼식 날짜를 손꼽아 기다렸던 어린 시절처럼 이날 행사를 내심 기다려 왔었다. 오래 전, 큰언니가 마당에서 구식결혼식을 올렸을 때 동네아이들은 울타리 너머에서 킥킥거리며 얼마나 즐거워들 했던가! 아이들은 진짜 왕과 왕비를 만난 것처럼 좋아하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퇴장 전에 기념촬영 시간을 공식적으로 갖게 돼, 운현궁의 봄날은 왁자지껄 성대한 잔칫날로 무르익어 갔다. 이곳 마당에서의 행사는 이렇게 끝났지만, 음식을 나누는 동뢰(同牢)라는 축제는 지금부터다. 매년 봄, 가을 연 2회 개최되는 연례행사이니까 봄철 기회를 놓친 사람은 풍성한 가을을 기다려 관람기회를 갖는 것도 좋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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